하마구치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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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마구치 내각은 1929년 7월 2일부터 1931년 4월 14일까지 652일 동안 재임한 일본의 내각이다. 다나카 기이치 내각의 사퇴 이후 하마구치 오사치가 총리로 임명되어 성립되었으며, 주요 정책으로는 금본위제 복귀와 런던 해군 군축 회의를 추진했다. 1930년 하마구치 총리가 암살 시도를 당해 시데하라 기주로 외무대신이 임시 대리를 맡았으나, 총리 복귀 후 건강 악화로 사임했고, 제2차 와카츠키 내각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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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구치 내각 | |
---|---|
내각 정보 | |
내각 이름 | 하마구치 내각 |
일본어 | 濱口内閣 (はまぐちないかく) |
대수 | 27대 |
수상 | 하마구치 오사치 |
수상 전직 | 중의원 의원, 입헌민정당 총재 |
![]() | |
내각 구성 | |
성립 | 1929년 7월 2일 |
종료 | 1931년 4월 14일 |
전임 내각 | 다나카 기이치 내각 |
후임 내각 | 제2차 와카쓰키 내각 |
여당 | 입헌민정당 |
의회 정보 | |
선거 | 1930년 총선거 |
해산 | 1930년 1월 21일 |
임기 | 제57회 제국의회, 제58회 제국의회, 제59회 제국의회 |
원내 블록 | 중의원 블록: 입헌민정당 귀족원 블록: 겐큐카이 고세이카이 도우와카이 도세이카이 |
정부 정보 | |
국가 원수 | 쇼와 |
정부 수반 직함 | 내각총리대신 |
정부 수반 | 하마구치 오사치 |
기타 정보 | |
명단 | 내각 관방 홈페이지 |
2. 재직 기간
1929년 7월 2일부터 1931년 4월 14일까지 총 652일 동안 재직하였다.[1]
1929년 7월 2일, 다나카 기이치 내각(입헌정우회)이 만주 벙커 사건 처리 실패로 내각 총사퇴했다. 사이온지 긴모치 원로는 헌정의 정도에 따라 야당 제1당인 입헌민정당의 하마구치 오사치 총재를 총리로 추천했고, 즉시 내각이 발족했다.[17]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만주 벙커 사건 수습 실패로 내각 총사퇴한 후, 1929년 7월 2일 사이온지 긴모치 원로의 추천으로 입헌 민정당 총재 하마구치 오사치가 총리로 지명되어 내각이 발족했다.[17] 소수 여당으로 시작했지만, 1930년 1월 21일 중의원 해산 후 2월 20일 제1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승리했다.
하마구치 내각은 만주 벙커 사건의 사태 수습에 실패하여 내각 총사퇴한 다나카 기이치 내각의 뒤를 이어, 사이온지 긴모치 원로가 헌정의 정도에 따라 야당 제1당인 입헌 민정당의 하마구치 오사치 총재를 추대하면서 성립되었다. 소수 여당으로 시작했지만, 1930년 1월 21일 중의원 해산 후, 2월 20일 제1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승리하였다.
주요 정책으로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지속된 금 수출 금지 및 금본위제 중지 상태를 해제하고, 1930년 1월 11일 금본위제 복귀(금 해금)를 단행하였다. 이를 통해 환율 안정과 일본 경제의 국제 경쟁력 향상을 기대했으나, 1929년 10월 24일 발생한 세계 대공황과 겹치면서 일본 경제는 불황에 빠졌다. 또한, 디플레이션 정책 추진은 불황을 더욱 심화시켰다.
1930년 1월 21일에는 런던 해군 군축 회의에 참여하여 열강들과 해군 보조함 보유율 협상을 진행, 최종적으로 대영미 비율 69.75%로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해군 내 강경파, 추밀원, 야당 정우회는 정부의 군부 통수권 침해를 주장하며 비판했다(통수권 침해 문제). 하지만 정부는 조약 협상이 정부의 외교 대권 범주라는 해석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추밀원도 9월 17일 조약을 비준하였다.
1930년 11월 14일,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는 폭한에게 습격당해 중태에 빠졌고, 시데하라 기주로 외상이 총리 임시 대리를 맡았다. 그러나 시데하라 외상의 국회 대응은 미흡했고, 런던 조약 비준 문제에 대한 "천황의 칙허를 받았기 때문에 문제 없다"는 답변은 '시데하라 실언 문제'로 비화되었다. 1931년 3월 9일,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는 복귀했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4월 4일 사임하고, 4월 13일 와카쓰키 레이지로 전 총리가 총재에 취임하며 내각은 총사퇴했다. 4월 14일, 제2차 와카쓰키 내각이 성립되었으며, 8월 26일 하마구치 오사치 전 총리는 사망하였다.
3. 성립 배경
4. 주요 정책 및 사건
; 주요 정책
:: 그러나 일본 해군 내에서는
::* 전체 대미 7할
::* 상주 4척 7할
::* 잠수함은 대등
:: 의 3대 방침을 정했으나, 어느 것도 지켜지지 않아 군 내부 파벌 항쟁과 함께 비판이 제기되었다. 조약 체결 과정에서 정부의 군부 통수권 침해 논란(통수권 침해 문제)이 발생했으나, 정부는 외교 대권 범주라는 해석을 유지했고, 9월 17일 추밀원도 비준했다.
1930년 11월 14일, 하마구치 총리는 폭한에게 습격당해 중상을 입었다. 시데하라 기주로 외상이 총리 임시 대리를 맡았으나, 국회 대응 미숙과 런던 조약 비준 문제 관련 실언('''시데하라 실언 문제''')으로 정치적 문제가 발생했다. 1931년 3월 9일 하마구치 총리는 시데하라 외상의 임시 총리 대리직을 해임하고 정무에 복귀했으나, 병세 악화로 4월 4일 재입원 후 사임했다. 4월 13일 와카츠키 레이지로 전 총리가 총재에 취임하며 내각은 총사퇴했고, 4월 14일 제2차 와카츠키 내각이 성립되었다. 하마구치 전 총리는 8월 26일 사망했다.
5. 내각 구성
하마구치 내각의 각료 명단은 다음과 같다.
직책 | 이름 | 정당 | 임기 시작 | 임기 종료 |
---|---|---|---|---|
내각총리대신 | 하마구치 오사치 | 입헌민정당 | 1929년 7월 2일 | 1931년 4월 14일 |
외무대신 | 시데하라 기주로 | 무소속 | 1929년 7월 2일 | 1931년 4월 14일 |
내무대신 | 아다치 겐조 | 입헌민정당 | 1929년 7월 2일 | 1931년 4월 14일 |
대장대신 | 이노우에 준노스케 | 입헌민정당 | 1929년 7월 2일 | 1931년 4월 14일 |
육군대신 | 우가키 가즈시게 | 육군 | 1929년 7월 2일 | 1931년 4월 14일 |
아베 노부유키 (대리) | 육군 | 1930년 6월 16일 | 1930년 12월 10일 | |
해군대신 | 다카라베 다케시 | 해군 | 1929년 7월 2일 | 1930년 10월 3일 |
아보 기요카즈 | 해군 | 1930년 10월 3일 | 1931년 4월 14일 | |
사법대신 | 와타나베 지후유 | 무소속 | 1929년 7월 2일 | 1931년 4월 14일 |
문부대신 | 고바시 이치타 | 입헌민정당 | 1929년 7월 2일 | 1929년 11월 29일 |
다나카 류조 | 입헌민정당 | 1929년 11월 29일 | 1931년 4월 14일 | |
농림대신 | 마치다 주지 | 입헌민정당 | 1929년 7월 2일 | 1931년 4월 14일 |
상공대신 | 다와라 마고이치 | 입헌민정당 | 1929년 7월 2일 | 1931년 4월 14일 |
체신대신 | 고이즈미 마타지로 | 입헌민정당 | 1929년 7월 2일 | 1931년 4월 14일 |
철도대신 | 에기 다스쿠 | 입헌민정당 | 1929년 7월 2일 | 1931년 4월 14일 |
척무대신 | 마쓰다 겐지 | 입헌민정당 | 1929년 7월 2일 | 1931년 4월 14일 |
내각서기관장 | 스즈키 부사미 | 입헌민정당 | 1929년 7월 2일 | 1931년 4월 14일 |
법제국장관 | 마에다 요네조 | 입헌정우회 | 1929년 7월 2일 | 1929년 7월 3일 |
가와사키 다쿠키치 | 입헌민정당 | 1929년 7월 3일 | 1931년 4월 14일 |
5. 1. 국무대신
입헌민정당무소속
(동화회)
남작
(외무대신 겸임)
무소속
(동화회)
남작
입헌민정당
(무소속→)
입헌민정당
(무회파)

(육대 14기)
(육대 19기)
(반열)
1930년 12월 10일 면직[6]
(해병 15기)
(해병 18기)
남작
1930년 10월 3일 임명[7]
무소속
(연구회)
자작
입헌민정당
1929년 11월 29일 면직[8][9]
입헌민정당
1929년 11월 29일 임명[9]
입헌민정당
입헌민정당
입헌민정당
입헌민정당
(동성회)
입헌민정당
(육대 19기)
1930년 6월 16일 임명[5]
1930년 12월 10일 면직[6]